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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혼잣말

낯선 할아버지의 설교

며칠 전,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옆 좌석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쥐고 있던 내 폰을 가리키며 "그거 음악 나오는 거여?" 하고 말을 건네셨다.
요금을 비롯해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손주들이  당신께 사달라고 하도 조르길래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설교를 하기 시작하셨다. 약주 한 잔 기분좋게 걸치신 듯 했는데.

말씀을 하실수록 점점 목소리가 커지셨다.ㅠㅠ
이유없는 할아버지의 흥분에 당황한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네, 네 듣고만...

버스 안 사람들이 힐끔힐끔 날 이상하게 쳐다 보았다. 저 아가씨가 뭘 잘 못했나.. 하는 눈빛.

 

물론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저 할아버지께서 손녀 같은 나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여든을 훌쩍 넘으신 당신께는
외과의사인 아들, 한의사인 딸 하나씩 있는데

뒷바라지 하는데에 돈과 정성이 참 많이 들어갔으며

힘들어 찾아올 때마다 마다않고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키워놓고 보니

막상 부모가 돈 없고 어려울 때는 나몰라라 하여 배신감이 많이 들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니까 없는 돈이라도 만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며...

 

돈 있으면 달라붙고 돈 없으면 떠나는 게 인간 관계라 하셨다.

손주들이 지애비가 아닌 당신께 찾아오는 것은 능력이 있어서, 즉 돈이 있어서기 때문이고,

하물며 경로당을 가더라도

만원한장 쉽게 꺼내 놓아야 어울리지 돈 없으면 상대도 안해준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람과 부대끼며 의지하고 살아야하노라 강조하셨다.
자식들과 할머님을 외국에 보내놓고 혼자 지내니 너무 외롭다고...
부끄럽지만 당신도 덩그러니 집에 혼자 있다보면 가끔 울기도 하신다고...

 

그러니
너희 자식들이 십시일반 모아 부모님 호주머니에 5만원이라도 넣어 놓아라,
호주머니 든든하면 기가 살 것이고, 허리가 펴질 것이고, 밖에 나갈 힘이 날 것이고,
밖에 나가야 사람도 만나고 생기가 돌고 살아 갈 맛이 날 것이다, 하며 힘주어 말씀하셨다.

 

요약하자면 돈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부모한테 잘해야 한다는 말씀.

 

나쁜 말씀도, 틀린 말씀도 아니기에 그저 조용히 들었다. 장장 삼십분 동안..
내릴 때가 되어서야 웃으시며, "나 이것 참, 별말을 다하네. 나 간다."하시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가셨다.

 

돈, 인간 관계, 외로움, 가족... 
이 순간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어렵고 무거운 것들.

아흔을 바라보는 당신의 순간에도 여전히 그것들은 문제로 남겨져있는가...하는 생각에

어찌나 서글프고 씁슬한지.

 

할아버지의 말씀이 자꾸 메아리친다.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더라. 안 되는 거야. 암 안되고 말고"
웃기게도 나는 그 말씀에 위로를 받고 동시에 꾸짖음도 들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인생이니 어긋나도 노여워 말고 슬퍼 말고, 포기마라.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만만하게 보지 말고 힘차게 걸어가라.

 

용기를 가져라, 꿋꿋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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